독일 반전 문학으로 되돌아보는 21세기의 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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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반전 문학으로 되돌아보는 21세기의 휴머니즘
  • 이기하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3.28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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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과 헤르만 헤세의 삶 그리고 저작

[웰니스앤컬처뉴스 이기하 칼럼니스트] 고대 로마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쟁과 관련된 유명한 격언이 하나 있다. “전쟁은 노인이 결정하지만, 전장에서 죽는 것은 젊은이들이다.” 어느 역사가의 명언처럼 인류의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백 나노미터 크기의 치명적인 바이러스들과 싸우는 전쟁의 역사인 동시에, 그 바이러스들이 숙주로 삼고 있는 인류 사이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사진출처=pixabay]
[사진출처=pixabay]

21세기, 스마트 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문명의 황금기가 열렸지만 폭력의 축제인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사활을 건 전쟁을 하는 동시에, 유럽과 러시아의 경계에서 일어난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초법적 살인이 허용되는 전쟁은 무엇보다 인간의 이성을 황폐하게 만든다. 특히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전쟁이 멈춘 휴전상태로 반세기 이상을 지속해온 우리에게 전쟁의 트라우마는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이성을 지키는 것은 휴머니즘이다. 독일의 대표적 반전 문학가인 토마스 만과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통해 21세기적 휴머니즘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다시 돌아보는 독일 반전 문학, 양심의 목소리

독일은 어느 나라보다 강한 자존심과 민족주의 의식을 가진 나라다. 세계 대전을 두 번이나 일으켰고, 그 결과 패전과 분단을 경험했다. 하지만 현재 독일은 아픈 과거를 딛고 유럽 연합을 주도하며 유럽의 성장과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가 도출되기까지는 작가와 예술가 그리고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컸다.  20세기 독일의 문학과 지성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은 바로 ‘마의 산’으로 대표되는 토마스 만과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작품으로 한국에 잘 알려진 헤르만 헤세다. 그 외에 프란츠 카프카등 유태계 작가들과 레마르크, 귄터 그라스, 베른하르트의 대표적인 저작들도 당시 독일의 어두운 사회적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독일이 주도한 전쟁에 반대하며 양심선언을 한 작가들의 책은 당시 독일 내에서 금서가 되었고, 망명길에 오른 몇몇은 아예 귀국도 못하고 결국 타지에서 눈을 감았다.

역사상 크고 작은 전쟁이 있을 때마다 예술계에서도 반전에 대한 열망과 기운이 생겼다. 특히 문학계를 대표하는 당대 지성들은 자신의 운명을 걸고 총보다 강한 펜으로 반전의 목소리를 냈다. 자연주의 문학을 추구하는 헤르만헤세와 독일 시민문학의 대가인 토마스만 서로의 작품세계는 달랐지만 둘 다 노벨상을 수상한 세계 문학계의 거장이기도 하다. 헤르만 헤세는 나치에 의해 직접적인 탄압받은 작가로도 유명하다. 토마스 만도 베를린에서 나치즘의 위험성을 경고하다 망명길에 올랐다. 토마스 만 보다는 헤르만 헤세가 좀 더 오래 살았는데, 토마스 만이 죽었을 때, 헤르만 헤세가 그의 장례에 참석해 조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예술가는 감정과 사상, 아름다움과 윤리, 행복감과 양심이라는 상반된 두 가치 사이에서 고뇌하는 존재다.”

독일의 소설가이며 평론가인 토마스 만(1875∼1955)의 ‘마의 산’은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독일의 소설예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인 토마스 만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양심’으로 192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생했다. 그는 독일 뤼베크의 부유한 곡물상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형 H.만(1871∼1950)과 장남 K.만(1906∼1949)도 모두 작가였다. 189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집안이 파산, 몰락하여 1893년 가족이 모두 뮌헨으로 이사했다. 예술분야에 관심을 가진 그는 생계를 위해 보험회사에 근무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쇼펜하우어의 고뇌하는 의지, 바그너의 음악적 기법, 니체의 의지철학 등의 영향이 녹아 있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가 높이 평가한 ‘마의 산’(1924)은 발표전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집필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세계 대전 후에 완성된 ‘마의 산’은 죽음과 과거에만 집착하였던 초기의 우울한 민족적 의식에서 벗어나 삶과 미래에 봉사하는 사랑의 휴머니즘으로 향해 간 정신적 변화과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토마스 만은 일찍부터 나치스의 대두를 위험시하고 ‘이성에의 호소’ 등의 정치적 강연 및 많은 평론을 통하여 독일시민계급에게 그 위기를 호소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국외강연여행에 나선 그는 그대로 망명생활에 들어가 스위스에 거주하여 독일의 국내사정을 조용히 살피면서 반(反)파시즘 기관지 ‘척도와 가치’(1937∼1939)를 발행해 나치즘에 대항하는 전투적 휴머니즘의 대표자가 되었다. 1938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교의 초빙교수로 초청되어 미국으로 이주한 후 미국 내의 14개 도시에서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강연을 했으며, 1944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1940년부터 1945년 5월까지 BBC 방송을 통하여 독일국민에게 히틀러 타도를 호소하는 정기방송을 계속했다. 그는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평론가로서도 탁월하여 문학, 예술, 철학, 정치 등 많은 영역에 걸쳐 우수한 평론과 수필을 많이 남겼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1955년 8월 12일 F. 실러 사망 150주년 기념식 참석차 독일 여행 중 발병하여 스위스 취리히로 되돌아와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내 동향인의 삼분의 이는 이런 종류의 선동신문을 읽는다. 아침과 저녁 모두 이 상태의 글귀를 읽고 매일 설득돼 경고하고, 부추기고, 불만이나 증오를 돋운다. 그런 모든 준비의 목적과 결과는 다시 전쟁, 다가올 전쟁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너무나 간단명료하다. 어떤 인간도 알 수 있고, 단 한 시간만 생각하면 같은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그 누구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누구도 다음 전쟁을 피하자고 하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의 아이들 때문에 몇 백만이라는 대량 살인을 막지 않는다.(황야의 이리)”

‘수레바퀴 밑에서(1906)’로 한국에 많이 알려진 독일계 스위스인 소설가이자 시인 헤르만 헤세는 ‘유리알유희’로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수레바퀴 밑에서’는 헤세의 초기 작품에 속한다. 헤르만 헤세는 남독일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출생했다. 러시아령 에스틀란트 태생인 아버지 요하네스는 신교의 목사였고, 모계도 역시 유서 있는 신학자 가문이었다. 외조부 헤르만 군데르트는 우수한 신학자로, 인도에서 다년간 포교에 종사했는데, 그가 소유한 인도학과 수천 권의 장서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 마리는 인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교육을 받고, 인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영국인 선교사와 결혼하였으나, 그와 사별한 후 칼프에서 요하네스와 재혼하여 그를 낳았다. 헤세는 4세부터 9세까지, 한때 스위스의 바젤에서 지낸 것 외에는 대부분 칼프에서 지냈으며, 나중에 그는 이 거리를 '겔바스아우'란 이름으로 묘사했다. 1890년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에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사진출처=pixabay] 헤르만 헤세 박물관
[사진출처=pixabay] 헤르만 헤세 박물관

헤세는 천성적인 자연인으로서, 개성에 눈뜨면서 미래의 시인을 꿈꾼 헤세는, 신학교의 속박된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곳을 탈주, 한때는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노이로제가 회복된 후 다시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1년도 못 되어 퇴학하고, 서점의 견습 점원이 되었다. 그 후 한동안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병든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칼프의 시계공장에서 3년간 시계 톱니바퀴를 닦으면서 문학수업을 시작하였다. 문학적으로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하고 그에게 확고한 문학적 지위를 얻게 해준 것은 최초의 장편소설 ‘페터카멘친트’(1904)였다. 그는 그 해에 9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 이어 스위스의 보덴 호반의 마을 가이엔호펜으로 이주한 후 시 쓰기에 전념했으며,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그 후 그가 걸어온 긴 생애에는 여러가지 사건들이 많았다. 인도 여행으로 동양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일,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문단과 출판계로부터 지식계급의 극단적인 애국주의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비난과 공격을 당한 일,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정신병, 그 자신의 신병등 가정적 위기를 당하자 정신분석 연구로 이 위기를 타개하고 작풍이 뚜렷하게 달라진 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인간성을 말살시키려고 한 나치스의 광신적인 폭정에 저항한 일 등 많은 파란을 겪었지만, 1962년 8월 9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오로지 자아 성찰과 자기실현의 길을 걸었다. 망명이후 적극적으로 반나치즘 활동을 한 토마스 만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자료참조=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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