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소개] 민족혼 속에 살아숨쉬는 초인,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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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민족혼 속에 살아숨쉬는 초인, 이육사
  • 김숙정 기자
  • 승인 2022.03.01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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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pixabay]
[사진출처=pixabay]

[웰니스앤컬처뉴스 김숙정 기자]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이 있다. 《청포도(靑葡萄)》,《광야》, 《교목(喬木)》 등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목가적이면서도 장엄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생애를 돌아보고자 한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山脈(산맥)들이
바다를 戀慕(연모)해 휘날릴때도
참아 이곳을 犯(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 없는 光陰(광음)을
부즈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江(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梅花(매화) 香氣(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천고)의 뒤에
白馬(백마) 타고 오는 超人(초인)이 있어
이 廣野(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廣野), 이육사

육사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태어났다. 수필 [계절(季節)의 오행(五行)]에서 "내 동리(洞里) 동편에 왕모산이라고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母后)를 뫼시고 몽진(蒙塵)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성지(城址)가 있지만 대개 우리 동리(洞里)에 해가 뜰 때는 이 성 위에 뜨는 것"이라고 고향을 이야기한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선생의 14대 손이다. 독립운동사의 첫 장(1894년 갑오의병)이 열린 곳이자 가장 많은 자결 순국자를 배출한 곳이 안동이다. 그의 강직한 저항성은 퇴계 학통에서 나왔고 그의 문학적 기질도 역시 퇴계학통의 연장이라 이해할 수 있다. 

이육사의 맏형인 원기는 대구로 이사 후 부모를 모시고 동생을 거느리며 어려운 살림을 도맡았다. 그는 끊임없이 일을 펼치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가난하고 힘든시절이었음에도 육사의 형제들은 우애가 대단하기로 소문이 났다고 전한다.

그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고 자(字)는 태경(台卿)이며, 어릴 때 이름이 원삼(源三)이었다. 만 18세가 되던 1922년, 영천 백학학원에 다닐 때도 원삼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고 동기생 정연활이 증언했다. 1926년 중국 중산대학 동창생 명부에 '이활(李活)'로 기록되어있다. 1927년 가을부터 1929년 5월까지 옥고를 치른 뒤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도 '이활'을 사용했다.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첫 시 〈말〉이 '이활'이란 이름으로 게재되었다. 

[사진출처=이육사문학관]
[사진출처=이육사문학관]

이육사라는 이름은 1930년 그의 글에서 처음 사용되는데 264는 그의 수인번호였다. 1년 7개월 동안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린 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은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는 뜻과 식민지 세상을 비웃기 위함이었으리라. 일제 식민지에서 영원한 죄인이라는 자조섞인 웃음이 담긴 이름이다. 

1932년 의열단(義烈團)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제1기생 입학 명단에 육사(陸史)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고기 육(肉) 설사할 사(瀉)라는 이름을, 바로 이어서 죽일 육(戮) , 역사 사(史) 육사(戮史)를 사용했다. 집안 아저씨인 이영우가 " 육사(戮史)는 역사를 죽인다는 표현이니,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말 아닌가? 의미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차라리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표현이 되는 '陸史'를 쓰는게 좋겠다"고 권했다. 

이육사가 1927년 중국 베이징을 다녀온 후 독립활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을 때, 대구 전체를 뒤흔든 거사가 발생하였다. '장진홍 의거'가 바로 그것이다. 1927년 10월 18일 11시 50분에 조선은행 대구지점(중앙로)으로 신문지에 쌓인 폭탄이 배달되었다. 이것을 확인하던 직원이 놀라서 길거리에 내놓았을 때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에서 일경은 장진홍이란 인물은 물론 단서조차 잡지 못하자,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거짓 진범을 조작해 법정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육사를 비롯하여 원기·원일·원조 등 4형제, 그리고 이정기도 함께 검거되었고, 원조·원기가 먼저 석방되고 나머지 육사 형제들은 미결수 상태로 1년 반을 넘겼다.

그런데 애당초 육사를 비롯한 인물들이 장진홍 의거에 직접 연루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은 거사 후 1년 4개월이 지난 1929년 2월 14일에 주인공 장진홍이 일본 오사카에서 체포되면서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들은 장진홍에 대한 예심이 끝나던 그해 5월까지 장기간 미결수 생활을 하고, 12월에 가서야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그들이 이 거사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바로 그들이 석방된 판결문 내용, 즉 `(검찰이) 공판에 회부한 범죄의 혐의가 없다'는 데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결국 혹독한 고문으로 붙인 죄목에 억지로 꾸며낸 시나리오로 육사 형제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동안 육사 형제들이 장진홍 의거에 참여했다고 알려지거나 기록된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의열단에는 결코 가입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이수기간은 1932년 10월 20일부터 1933년 4월 20일까지 6개월이었고, 입교생들은 재학중에 학원(學員)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국민군 보통병사의 상위로서 견습사관의 대우를 받고 졸업 2∼3개월 후에는 소위로 임관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 9시에 취침하기까지 교양과목과 군사학을 교육받았다. 교양과목으로는 정치학(교관:한모), 경제학(교관: 왕현지), 사회학과 조직방법(교관:김정우), 철학(김원봉)을 배웠고 그외 군사학, 통신법, 선전법, 연락법 등을 비롯하여 탄약, 폭탄, 도화선, 뇌관 등 제조법, 그리고 투척법, 피신법, 변장법, 서류은닉법, 삐라살포법, 암살법, 무기운반법, 철로폭파법, 열차운전법 등을 교습받았다.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들의 졸업식은 1933년 4월 23일 학교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졸업식에는 교장 김원봉과, 남경중국일보 사장인 캉저(康澤)과 비밀공작법을 가르친 시에중용(協中庸) 등이 참석했다. 식이 끝난 후에는 연극이 공연되었는데, 이 공연에서 육사는 <지하실>이라는 대본을 썼고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졸업후 육사는 국내의 노동자 농민에게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것과 2기생 모집을 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는 귀국 후 언론활동을 통해서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의열단은 제1기생들의 재학 중에 교관이나 입학 때의 소개자를 통해 그들의 혁명의식을 확인한 후 극비밀리에 입단을 권유하고 이에 응한 사람에게는 가입맹서를 하게 했다. 제1기 졸업생들의 중요한 사명이 의열단 지부를 조직하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면 혁명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모두 의열단에 가입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제1기생들이 학교를 졸업한 약 2개월 후인 1933년 6월 말, 의열단 전체회의가 남경의 혁명간부학교에서 개최되었고, 여기에 참가한 제1기 졸업생 단원 18명의 명단이 있으나 그 속에 이활의 이름은 없다.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육성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된다. 일본 경찰은 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1932년 4월 이후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일본경찰의 기록에 "1932년 4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 그 뒤에 소재불명이어서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에 있었음"이라고 적혀 있다.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사진출처=이육사문학관] 1934년 서대문 형무소 신원카드 사진
[사진출처=이육사문학관] 1934년 서대문 형무소 신원카드 사진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보고내용은 다음과 같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당시 육사가 체포된 곳은 광화문 앞 본정에 자리한 경기도경찰부 경성본청이었다. 이 때 작성된 신원카드가 남아 있어, 이를 통해 그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신분은 상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키는 5척4촌5분인데 1척을 30.3cm 로 계산하면 165cm다. 

1943년 7월에 그는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고향마을인 원촌과 안동풍산에서 일박하고 상경한 뒤,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된다. 부인 안일양은 7월에 동대문 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보았다고 전한다. 20여일동안 구금생활을 치르다가 "딸 옥비에게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딸의 볼을 얼굴에 대고,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20여일 후 베이징으로 끌려갔다. 육사의 마지막 길이었다. 육사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육사의 《청포도》라는 시는 남성적이고 의지적인 어조를 주로 사용한 다른 작품에 비해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청색과 백색의 선명한 색채 대비를 통해 밝고 희망적인 느낌을 주고 있으며, 전통적 소재를 활용하여 정감어린 고향의 정경을 표현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청포도”를 통해 밝은 미래가 담긴 “전설”을 마주하며,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기다리는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은 이육사의 또 다른 작품인 《광야》에 등장하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했던 지사들의 모습이자, 평화로운 일상의 삶에서 분리되어 유랑하는 고달픈 자들을 대변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기다린 그를 맞아 순수하고 고결한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과 더불어 청포도를 대접하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은 “그 날”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가짐을 잘 나타내고 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하며 정성스러운 기다림과 간절한 심정이 바로 그것이다.

식민지 상황을 감안할 때 시인이 이토록 기다리는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여는” 그 날은 바로 조국 광복이 이루어지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인은 청포도라는 밝고 투명한 소재를 통해서 억압된 시대의 장벽을 넘어 평화로운 삶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잔잔하게 노래하고 있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대륙을 전전하며 숱한 고난과 역경을 체험하면서 인고의 극복의지를 기다림의 철학과 초인 의지로 승화시켰던 이육사. 온 몸을 내던진 헌신적 투쟁으로 일제에 저항하며 끝없는 기다림과 초인(超人)에 대한 열망을 시로써 형상화한 그의 진정한 저항 정신이 후대에 널리 스며 우리의 정신에 깊이 뿌리박히길 기원한다. [내용참조=이육사문학관] 

 

[사진출처=웰니스앤컬처뉴스]
[사진출처=웰니스앤컬처뉴스]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다 먹으면

두 손을 흠뻑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두렴

​ - 이육사의 '청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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