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의 마지막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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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의 마지막 편지
  • 한은경 기자
  • 승인 2022.04.1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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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바쳐 지켜낸 민주주의, 당신의 목숨만큼 감사히 누리며 소중하게 지키겠습니다.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4.19 당시 시민의 모습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4.19 당시 시민의 모습

[웰니스앤컬처뉴스 한은경 기자]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이 4.19혁명이다. 4월혁명, 4·19의거라고도 한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허정 과도 정부를 거쳐 제 2공화국 장면 정부가 들어선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을 당시에는 민주적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이 한국사회에 널리 퍼져 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정부의 행태가 더욱 비민주적으로 되어가고 대규모의 부정선거가 자행됨에 따라 이승만정권의 독재를 규탄하며 대중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게 되었다. 

1945년 이래로 민주주의 교육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도시 또는 준도시 사람들이 대중매체를 널리 접촉게 됨으로써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식시키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이러한 민주주의 정치교육의 긍정적 결과로 많은 조사결과 젊은층들이 기성세대들보다 좀더 민주적으로 전향되었음이 발견되었다. 

도시화는 일반국민의 민주적 사회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52년 남한 인구의 17.7%만이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 살았다. 그러나 이는 1955년에 24.5%, 1960년에는 28%로 늘어났다. 확장된 교육의 발전과 사회의 산업화 및 상업화의 결과로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정치세력이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으로 양극화되어 유권자들은 각자의 정치의식의 수준에 따라 누구를 반대하고 누구에게 투표하여야 할 것인가를 쉽사리 판단할 수 있었다.

1958년 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출신의 의원은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서 오직 13명만 당선되었으나 민주당은 43명이 선출되었다. 반면, 나라 전체를 볼 때 민주당은 79석, 자유당은 총 126석을 얻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李承晩)은 나라 전체로 볼 때 56%의 지지를 받았으나 서울에서는 38%밖에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도시지역에서 자유당의 약세는 대도시에서는 부정선거를 쉽게 저지를 수가 없는 환경적인 요인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권자의 교육 수준이나 정치 의식이 낮을 때, 지방의 유지나 교육을 받은 사람의 의견을 따라 투표하는 ‘준봉투표(conformity votes)’가 비도시지역에서 팽배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화와 도시화의 증대에 따라 이러한 ‘준봉투표’는 급속히 감퇴하기 시작했고, 자유당은 점점 더 ‘비민주적’이고 강압적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이승만과 그의 정권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여러 문제를 내어서 대중시위를 조작해내기까지 하였다. 국토를 양분시켰던 공산주의자들과의 휴전협정을 반대하는 대중시위와 행진, 1952년에서 1956년의 기간중 이승만을 재선에 나서도록 부추겼던 대중시위, 일본 당국의 재일교포 북송결정에 항의하는 대중집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제대중 동원은 1950년대 초반기 동안 어느 정도까지는 이승만의 인기를 회복시키고 유지시켜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국민들 사이에 이승만의 인기는 사라졌고, 그의 권력은 오로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1960년 3월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실제적으로 많은 공무원들이 이승만의 당선을 위해 동원되었다. 이전의 선거에서는 경찰의 개입이 후보자등록·선전활동·투표과정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반하여,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이제 실질적인 선거본부가 되어 투표총계를 조작하고 날조하였다. 1960년 많은 국민들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趙炳玉)의 죽음으로 더욱 실망에 빠졌다.

선거전에서 야당선거원들은 계속해서 체포되고 탄압을 받았다. 반공청년단의 폭력단원들이 선거 당일 시민들이 투표권을 어떻게 행사하는가 감시하기 위하여 각 투표장에 나타났다. 많은 농촌지역에서는 3인조·9인조 등의 ‘조’가 형성되었고, 자유당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가 각 조의 ‘조장’이 되어 ‘조원’들의 자유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책임졌다. 경찰은 공개적으로 자유당후보를 지원하였다.

게다가 선거 결과는 경찰 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서 완전히 날조되어,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 투표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3분의 1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다. 이기붕은 1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40만 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회에서는 민주당이 선거가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이미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서 부정선거와 불법선거를 규탄하는 반정부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민심은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이반되어 있는 상태였다. 

4월 초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을 때, 항구도시인 마산에서 최루탄을 눈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채로 마산 해변가에 버려진 16세 김주열(金朱烈)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마산 경찰에 의 총에 맞아쓰러졌다. 이러한 만행이 밝혀지자 학생과 시민의 분노가 또다시 폭발하기 시작했고 이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19 당시 플랫카드를 들고 이동하는 시민의 모습
4.19 당시 플랫카드를 들고 이동하는 시민의 모습

4·19혁명 전 주로 지방도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불법선거 및 자유당과 경찰의 반민주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를 산발적으로 행하였다. 마산에서의 시위에 대하여 이승만은 4월 15일, 그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런 사태의 비극에 책임이 있는 무분별한 사람들의 죄는 간과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이승만은 젊은 청년들을 폭동으로 유도하고, 선동하는 정치적 야심가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활동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였고, 4월 18일에는 서울에서 시위하고 있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로부터 습격을 당했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데모대에 대하여 발포하기 시작했기때문에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변했고, 전국적으로 부산·광주·인천·목포·청주 등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가세하였다. 서울에서만도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우리나라의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반포되었다.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중장 송요찬(宋堯讚)이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4월 19일 이후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면서 이제는 일반시민들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경계하고 재산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승만은 반정부시위에 관하여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4월 21일 내각이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결국, 4월 26일 새로 지명된 외무부장관 허정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그리고 주한 미국 대사였던 맥카나기(Macanarghy,D.P.)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승만은 대통령·부통령의 선거가 새로 실시될 것이고, 헌법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바꾸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경찰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정치권력이 학생들이 선봉에 선 반경찰·반관료적 대중에 굴복한 것이다. 

[사진출처=한국민족몬화대백과] 대학교수들의 시위, 1960년 4월 25일.
[사진출처=한국민족몬화대백과] 대학교수들의 시위, 1960년 4월 25일.

이후 교수들의 시위로 시작된 시위의 새로운 물결과 미국으로부터의 압력, 경찰력의 붕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으로부터의 지지결여 등등에 직면하여, 이승만은 1960년 4월 26일 사임을 발표하였다. [내용참조=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다음 내용은 시위에 참가한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 진영숙양의 편지다. 그녀는 시위 중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 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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